데이빗 린치, <블루 벨벳> - 정상-비정상세계의 충돌

복구이유 : 진지하게 쓴 리뷰라서


린치의 세계는 기괴하다. 허나 단지 기괴하지만은 않다. 그의 영화속 무대, 사건, 인물 관계, 그리고 개개의 인물내면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세계가 공존한다(물론 여기서는 정상과 비정상이란 말을 통념속의 뜻을 지니게 한 채로 빌려왔음을 밝힌다). 항상 밝고 평화로운 이면의 어둡고 기괴한 세계를 비추지만 원래의 정상적인 면을 무조건 허상이나 껍데기라고 부정해버리지 않고 양면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린치가 위대한 작가인 이유이다. 그래야 관객에게 더 효과적인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블루 벨벳 Blue Velvet>은 물론 린치 영화의 이러한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평화로운 소도시 룸버튼의 이면에 자리잡은 무서운 범죄와 변태적인 섹스의 세계.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인물은 당연히 주인공, 제프리라는 젊은이다. 집 근처에서 사람의 잘린 귀를 발견한 그는 곧 경찰에 신고하지만 자신은 호기심이 많다면서 자체적인 조사를 시작한다. 곧 사건을 담당한 형사의 딸인 샌디에게서 도로시라는 가수의 이름이 수사과정에서 오간다고 전해 듣고는 그의 집에 숨어든다.

도로시의 집은 비정상 세계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물론 그 세계는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수많은 인물들과 그들간의 관계, 사건, 그리고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나 도로시의 집이 가장 일관되게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블루 벨벳을 입은 여인이 사는 곳. 여기서 제프리는 룸버튼 갱의 두목인 프랭크가 도로시와 가학-피학적인 섹스를 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어느새인가 자신도 그렇게 하게 된다. 이 곳은 제프리가 도로시를 만나는 곳일 뿐 아니라 후에 두 개의 시체가 발견되고 제프리가 프랭크를 죽이는, 사건이 종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곳이 그 외부와는 단절돼있다는 점이다. 도로시가 존재하는 또 다른 공간인 클럽의 무대와 함께 생각해보자. 무대에는 온통 파란 조명밖에 없으며, 여가수의 몽환적인 노래와 매혹적인 모습은 눈으로 보면서도 환상이라고 할 만하다. 도로시의 집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보라색으로 덮여있고, 그 곳에 사는 블루 벨벳을 입은 여인 도로시와 프랭크의 관계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것이다. 프랭크는 스스로를 도로시의 아버지이자 아들이자 애인이자 주인과 비슷한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그녀의 아들을 납치했다.

허나 제프리는 이런 세계에 삶과 동시에 형사의 딸로 정상적으로 사는 샌디를 사랑한다. 보통 이런 설정이라면 도로시와 샌디에 대한 사랑 둘 중에 하나는 가짜인 것이 정상이겠으나 이 경우엔 그렇지 않아보인다는게 문제다.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제프리-도로시-프랭크의 기이한 관계 같은 것도 린치의 세계에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다. 별로 익숙치 않은 관객이라도 어쨌든 이 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관객은 결국 영화를 제대로 보지도 않을 터이니 얘기에서 빼도 좋을 것이다. 기왕에 <블루 벨벳>을 보는 관객이라면 제프리와 샌디의 정상적인 관계보다 제프리와 도로시의 기이한 관계를 더 진실한, 혹은 더 그럴 듯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얘기다.

허나 영화 자체는 제프리와 샌디의 관계를 부정해버리지 않고 있다.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나와있는 부분은 영화의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바달라멘티의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꼭 두 사람이 사랑을 속삭일 때, 혹은 외칠 때 등장한다. 제프리는 정상세계와 비정상세계 양쪽 모두에 진짜로 빠져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 둘은 언젠가 서로 만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사건이 절정을 향해 갈 때쯤 도로시가 벌거벗은 채로 제프리의 집 앞 거리에 나타난다. 제프리는 그때 불행히도 샌디와 함께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제프리의 정상세계 쪽의 인격과 생활을 지켜주던 샌디는 도로시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제프리에 대해 분노와 시기와 당황 등 참 많은 것이 섞여 뭐라고 표현도 안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샌디의 정신이 흔들리면 제프리의 정상세계쪽의 삶은 통째로 뽑혀나갈 수 있다. 그녀가 제프리의 연인일 뿐 아니라 제도의 수호자인 경찰의 딸이기까지 한 것은 상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얼마나 의미심장한 설정인지.

웃기는 것은 여기서 제프리와 관객이 함께 떤다는 점이다. 기왕에 린치의 골 때리는 세계를 즐겨보겠다고 DVD를 틀었건만 정작 주인공의 삶이 정상세계에서 완전히 이탈하려는 순간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대체 무언가.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다. 도로시가 있어야할 곳은 그녀의 집이 아니면 클럽의 무대이다. 그곳을 벗어나 정상세계의 한가운데서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객에겐 이질감을 주고 더 나아가 충격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위에는 극중인물인 제프리의 위기가 겹쳐진다.

결국 그 위기는 극복되고 제프리는 프랭크를 정당방위로 살해하며 모두의 삶은 정상으로 복귀한다. 심지어 도로시까지 말이다. 전체적으로는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엔딩처럼 보이지만 감독은 여러 극적 장치를 활용하며 해피엔딩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룸버튼의 평화로운 풍경과 아름다운 음악은 그렇다 치더라도 샌디의 개똥지빠귀 이야기는 조금 심하다 싶다. 인물들이 단지 정상으로 돌아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천국에 와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의 태도는 아주 모호해진다. 정상세계의 묘사가 룸버튼의 지나치게 평화로운 풍경이나 샌디의 개똥지빠귀 이야기같은 과장으로만 돼있으면 그것을 가짜라고 치부해버리기가 오히려 쉽다. 허나 우리에겐 여전히 제프리와 샌디의 사랑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존재는 개똥지빠귀 같은 과장까지도 정당화하는 듯 하다.

도로시와 제프리의 집 앞에 나타났을 때의 충격까지 포함하여, 결국 고민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영화는 두 세계 모두를 진짜라면서 보여주었고 실제로 우리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이 영화를 왜 재미있어 하는지는 알아서 생각해야만 한다. 다만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정상세계에서는 제프리와 샌디를 제외하면 꽤 많은 가짜들이 보인다. 경찰인 고든은 범죄조직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게다가 제프리의 집에 있는 이모조차 프랭크나 도로시에 대해 알고 있다는 암시가 영화속에 숨어있다. 제프리가 산책하겠다고 나설 때 이모가 어떤 경고를 하는지 귀 기울여보라.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여놓고 나니 생각나는 게 있다. 린치는 '사랑만이 진실이다!'라는 얘길 하려 한건가? 설마.

by 염맨 | 2005/01/14 00:33 | 영화 잡설, 감상, 리뷰 | 트랙백(2)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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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t 2007/02/08 01:55

제목 :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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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zehng's Apar.. at 2010/09/09 11:45

제목 : 블루 벨벳
고등학교 때 그가 1977년도에 연출한 ‘이레이져헤드’라는 영화를 봤을 때 진짜 특이하고 난해한 영화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후 그의 영화를 거의 접하지 않다가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했던 ‘광란의 사랑’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다시 데이비드 린치라는 감독에 대해서 관심 있게 찾아봤다. 이후로 ‘멀홀랜드 드라이브’까지.. 무려 제작기간이 6년이 걸린 ‘이레이져헤드’ 이후(중간에 앨리펀트 맨 이라는 영화로 그의 이름은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졌지만) 에 ......more

Commented by FromBeyonD at 2005/01/14 02:07
염맨님 간만의 영화관련 포스트에 내용관련 덧글을 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영화본지가 너무 오래되다보니 기억이 전혀 안나네요. ㅠㅠ
Commented by 심장 at 2005/01/15 16:59
크으..블루벨벳 정말 옛날에 본건데요..
블루~~~~벨벳~~ 하는 노래가 아직도 귀에서 맴도네요
Commented by 염맨 at 2005/01/15 22:45
FromBeyond/ 아무래도 그 덧글은 너무 무서웠어요.. 제가 나중에 보면서 후회했음..ㅠ.ㅠ.ㅠ 그래도 며칠전에는 최근 개봉작으로 논쟁적인 글을 써서 덧글 20개 돌파했으니 괜찮아요.

심장/ 허허. 이자벨라 로셀리니 처음봤는데 멋지멋지었어요.
Commented by Wind-Fish at 2005/01/16 15:19
영화를 보지 않으면 결코 리플을 달 수가 없을 만한 글이군요.. 딱히 뭐라 할말은 없지만 첫번째 문단은 좀 장황하고 린치라는 감독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그냥 그럴싸하게 고개만 끄떡이고 말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재밌게 쓰신 듯하군요 ^^; 다만 지독한 스포일성이라서 문제지만 ^^;
Commented by 염맨 at 2005/01/16 23:34
Wind-Fish/제 글들은 주로 리뷰이고 기본적으로 영화를 본 사람을 대상으로 쓰는 글이니까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02/04 14:47
예전에 제가 덧글을 남긴 흔적이 남아있네요.
저 당시부터 보고 싶어하던걸 이제 봤으니 정말 게을렀나봅니다.
염맨님에 비교할 때 전 조금 덜 진지한 리뷰를 남긴 것 같아요.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
Commented by 雪花º덕범♡ at 2006/11/10 12:21
지난 주 금요일에 블루벨벳을 봤습니다. 이 포스트를 읽어보니 조금은 접근하기 용의하겠네요. 읽기 편하고 쉽게 쓰신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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