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몬드 연애소동 (Fast Times at Ridgemont High)> - 에이미 핵커링, 카메론 크로우

단편들을 제외한다면 이번 상영회의 영화 중 가장 상영시간이 짧은 것이 이 <리치몬드 연애소동>이 아닐까 한다. 정말로 짧은 영화다. 오죽하면 제목에도 ‘Fast Times'라 적혀있겠는가. 게다가 90분이라는 물리적인 상영시간도 짧지만 관객들이 느끼는 시간은 그보다도 더 짧은 것이다. 20년도 더 된 영화라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이 하이틴 섹스코미디의 개그 센스는 놀라운 수준이다. 22살의 숀 펜이 대마초에 중독된 얼빠진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모습 같은 걸 보고도 웃지 않는 사람은 각 상영실에 두 명 이상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중 한 명은 과제에 치어 어젯밤 1시간 밖에 자지 못해 졸고 있는 사람, 나머지 한명은 ‘영화 볼 때는 안 웃어’라는 독특한 사상을 가진 영화잡지 기자.


그리고 그 코미디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부다. 여섯 명이나 되는 주인공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에 전체를 꿰뚫고 있다거나 특별한 주제의식을 가진 이야기 같은 것은 없다. 평을 쓰기가 매우 곤란한 영화라 하겠다. 이야기는 그만두고 인물 중심으로 보며 풀어나가려 해도 별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스피콜리 제외) 주인공들의 공통된 생각을 한 마디로 줄여서 이야기해볼까?

‘연애질(섹스포함)하고 싶어~!’

이러한 성적 호기심은 훌륭한 코미디의 소재가 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인물에 대해서 정리해두고 나니 이야기의 요약도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이야기의 요약도 위와 같이 극중 인물의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신나게 남자(혹은 여자)꽁무니만 쫓아다녔더니 1년이 가버렸다! 리치몬드 고등학교에서 엄청나게 빠른 시간을 보내버렸어.’

짧은 상영시간은 관객뿐 아니라 리치몬드의 고등학생들에게도 적용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짧은 문장으로 요약된 이야기가 우리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부라면 90분을 투자해서 이 영화를 보고 앉아있을 가치가 있는가? 성장을 주제로 한 ‘씨네꼼 새내기 영화제 <후레쉬맨 흥망사>’의 프로그램으로 넣어도 되는 건가?

물론이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상영시간 동안만이라도 관객을 신나게 웃겨주는 영화는 분명히 좋은 코미디영화다. 특히 그 웃음이 건전한 것일 경우에는. <리치몬드 연애소동>의 인물들은 섹스에 집착하지만 영화자체는 그러지 않는다. 사실 극중 인물들에게도 ‘집착’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고등학생다운 순수한 성적 호기심으로 가득차있을 뿐이고 영화는 이 정신없는 친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약간의 유머를 더하고 있을 뿐이다.

어떠한 심각한 고민도 하지 않고 세상의 부조리 따위를 겪는 일도 없이 사랑 놀음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십대들의 이야기가 성장영화로서 어떤 가치를 가지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아픔이 수반되는 큰 성숙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텍스트로 나오는 에필로그를 한 번 살펴보자. 누구는 대학을 가고, 누구는 서핑하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누구는 즐겁게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한다. 변함없이, 이냥저냥 즐겁게, 어쩌면 철이 덜 든 채로 살아가는 모습들. 어쩌면 이것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한 삶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요 며칠동안 올라온 장 비고의 <품행제로>, 정재은의 <둘의 밤>, 제임스 맨골드의 <처음 만나는 자유>, 그리고 이 <리치몬드 연애소동>의 감상은 이번에 동아리에서 여는 상영회를 위해 쓴 것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상영회'는 그런 뜻

*82년 당시 스무살이었던 제니퍼 제이슨 리가 15살의 스테이시를 연기합니다. 그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친구 린다 역은 피비 케이츠가 맡았고요. 숀 펜 뿐 아니라 이 두 여배우도 정말 볼만 합니다.

by 염맨 | 2004/03/13 23:29 | 영화 잡설, 감상, 리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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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rumic71 at 2004/03/14 00:43
오옷 피비 케이츠~ 라고 해도 지금은 완전히 잊혀졌지요.(세월무상)
Commented by WonderYears at 2012/12/12 22:00
2004년의 포스팅 이시네요.. 카메론크로우 작품들은 제게는 지금도 참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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