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냐가 <지옥화>에 가장 큰 에너지를 제공하고 가장 깊고 복잡한 갈등을 보여주며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있다는 의미에서 그가 이 영화의 가장 주체적인 인물, 곧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헌데 내가 이야기한 소냐라는 인물의 성격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가 철저하게 타자화돼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어떤 공포영화들의 경우와 같다.
어떤 종류의 공포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인 괴물은 상당히 자세하게, 인간적으로 묘사된다. 특히 이것은 우리나라 공포영화에서 잘 드러나는 경향인데(공포영화보다 좀 더 오래된 이야기에서부터 드러나던), 한 마디로 말해 우리나라 귀신들의 그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떠올려보라는 거다.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려 할 때도 대체로 그들은 참으로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린 보통 귀신이나 살인범보다는 그들에게 쫓기는 희생자를 주인공으로 친다. 이와 같이 누군가는 소냐가 <지옥화>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 바로 그라는 데에는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일단 소냐를 맡은 최은희가 이 영화에서 유일한 스타 배우이다. 동식과 영식, 주디를 맡은 각 배우들은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보아도 가장 많은 영화를 한 영식 역의 김학이 7작품에 출연했을 뿐이고 그 외에는 모두 작업한 작품 수도 많지 않고 특별한 경력을 가진 것 같지도 않다. 반면 최은희는 지금도 모두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으며 <지옥화>가 이미 그의 15번째 작품이었다. 따라서 당시 관객들에겐 당연히 소냐가 주인공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배우의 기존 지명도와 인기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최은희는 영화에서도 참 예쁘게 나온다.
최은희-소냐의 그러한 성적 매력은 영화 속 인물과 관객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통한다. 초반에 소냐가 그 매력, 유혹하는 능력을 사용해서 하는 일은 빤하다. 영식과 결혼을 약속하고도 양공주 일을 그만두지 않으며 시골에서 올라온 영식의 친동생까지 유혹해 그를 애인으로 삼는다. 이러한 성적 ‘방종’은 오래전부터 조선 남성들이 신여성의 부정적인 특질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성적으로 방종하기 이전에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각하고, 외모를 서양적으로 꾸미며 어떤 식으로든 사회생활을 하지만 그런 만큼 상대 남성과 가정을 챙기는 등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소홀한 신여성의 이미지를 물려받은, 그 중에서도 무척 특수한 형태의 직업이 바로 양공주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양공주로의 소냐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신여성의 새로운 스테레오타입이란 것인데 이것이 새로운 타입인 이유는 물론 일제 시대와 해방 후의 시대적 차이에 있다.
더 이상 조선인들을 식민지배하는 정부는 없다. 하지만 그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 경제는 피폐해졌고 강압적인 지배 대신 미국의 굴욕적인 원조에 의해 겨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양공주라는 존재는 이 원조의 굴욕성을 상징하거나, 혹은 그것을 굴욕적인 것으로 만든다. 남성들의, 혹은 전통적인 가치관으로(사실 지금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도) 용납할 수 없고 오로지 비난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그들은 경제의 중요한 일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양공주, 그것도 최은희만큼 서구적으로 예쁜 양공주를 대하는 남성들의 태도는 아주 복잡하다. 도덕적으로 비난하지만 또한 그 성적 매력에 굴복하며 그 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일 덕분에 자기들이 먹고 살 수 있다(<지옥화>에서 영식 일당은 양공주들의 도움을 받아서만 일을 할 수 있거나, 소냐의 전화 한 통에 모든 계획을 망치게 된다).
여기까지의 모든 이야기에 더해서 영화 속 남성들이, 혹은 영화가 소냐에 대해 얼마나 양가적이고 분열적인 태도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황혜진 등이 길게 논의한 바 있다. 보통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의 죽음이 방종한 여성에 대한 처벌이나 분열증을 앓고 있던 남성 스스로의 붕괴(영식의 죽음)로 읽힌다. 그러나 나한테는 이 장면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얼굴에 상처가 난 남자가 나이프를 들고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진흙탕에서 쫓는다.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 앞뒤 안보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자꾸 그 남자를 쳐다보며 뒷걸음질친다. 그러다 결국 넘어지고, 여자는 칼에 찔려 죽고 남자는 아까 당한 사고의 영향으로 결국 쓰러진 채 죽는다. 무척 자극적이고 보는 사람의 감정을 극단까지 쥐어짤만한 장면이다. 헌데 그 극단적인 감정이 방향성을 잃는다. 관객은 여기서 칼 든 사람에게 쫓기는 소냐에게 어서 도망가라고 응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서 저 년 죽이라고 영식을 응원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다른 관객의 반응에 대한 지레짐작이 아니라 이전까지 소냐가 묘사된 방식을 기초로 하여 예상한 결과이다.
초반까지 소냐의 모습은 전형적인 양공주라고 했지만 그가 동식과 연애를 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 취미이고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일에도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그리하여 정조는 물론이고 사랑 따위에도 아무 관심 없어보이던 소냐지만 그가 동식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이상하다. 물론 그를 처음 유혹할 때까지만 해도 오히려 이전까지의 스테레오타입에 아주 충실한 모습이지만 문제는 그 이후이다. 그는 이전까지 영식을 남편이라 부른 적도 없고 다른 어떤 남자를 애인이라 한 적도 없지만 동식을 만나러 갈 때는 애인을 보러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냐가 공원과 같은 화창한 바깥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 역시 여기서 처음 나온다. 비교적 보편적인 연애-사랑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소냐는 어느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영식의 범행 계획을 헌병대에 알리고는 그것을 또 당당하게 동식에게 말하며 이제 함께 도망가자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소냐는 동식이 자신의 형을 죽이거나 감옥에 넣고 자기들은 단 둘이 행복해진다는 계획에 동의하리라 생각했을까? 동식이 형을 배신할 정도로 자길 좋아한다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소냐 자신이 동식을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소냐가 동식을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면 그 진흙탕까지 쫓아가 스스로를 죽이게 되는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방향성을 잃은, 진흙탕에서 칼에 찔려 죽는 소냐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그나마 가깝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비장함인 것 같다. 세상에 대해 쿨한 태도로 일관하여 명성과 부와 기타 많은 것을 얻지만 묘하게 작은 부분에서 감상적인 행동을 한 주인공이 결국 그 작은 행동의 대가로 죽는다는 결말은 숱한 갱스터/느와르 영화들에서 반복된 것이다. 소냐가 죽는 상황은 어쩌면 이와 매우 비슷하며 보통 그런 상황에서 느껴지는 비장함 역시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상황이 비장하다면 그 상황의 주인공이 획득하는 것은 존엄성이다. 우리는 이때 비로소 ‘지옥에 핀 꽃’이라는 제목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 http://kmdb.or.kr/movie/md_basic.asp?nation=K&p_dataid=00367&keyword=지옥화
위 주소로 가면 영화 정보가 있고 단돈 500원에 VOD로 볼 수도 있다.
* '황혜진,「1950년대 한국 영화의 여성 재현과 그 의미」, 대중서사연구 제18호, 2007'를 참고했다.
* 이번 학기에 블로깅은 안 하지만 사실 글은 거의 매주 쓰고 있었다. 이것도 수업 제출용인데 그나마 여기 올리던 영화평과 가장 비슷한 것 같고, 영화를 구해보기도 쉬운 편이라서 올린다.
* 아래아 한 글에서 작성해서 옮기려니 이상하게 문단 형식이 많이 깨진다. 고쳐볼랬으나 잘 안 되고, 오늘 너무 피곤하다. 양해해달라.
# by | 2009/04/29 00:15 | 영화 잡설, 감상, 리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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