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달러 한줌A Fistful of Dollars>에 대한 글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주인공이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지 이야기했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여전히 이스트우드가 주인공인 이어지는 서부극들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바꾸면서도 기본적인 성격과 이미지는 그대로 유지했고 그것은 곧 이스트우드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본인의 연출작에서 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네 편의 서부극중 세편이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창백한 기수Pale Rider>와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와 <평원의 무법자/고원의 방랑자High Plains Drifter>가 그 세 편이다. 여기서 <창백한 기수>나 <고원의 방랑자>에서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주인공은 그야말로 유령과 같이 보이는 자들이고 <용서받지 못한 자>의 경우 처음에는 인간적으로 등장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역시 누구보다 살벌한 유령으로 분해 영화를 끝내고 만다. 하지만 이 세 편중에서도, 아니 애초에 그를 스타로 만들고 그 이미지를 쌓게 해준 레오네의 달러 삼부작까지 포함해서도 유난히 튀는 영화가 한 편 있는데 그것이 지금 다룰 <고원의 방랑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원의 방랑자>가 특이한 이유는 그것이 서부극의 고전적인 서사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전적인 서사란 서부 영웅이 황야에 세워져있는 한 공동체에 들어와 그 공동체 내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황야로 떠나가는 구조를 뜻한다. 그러나 애초에 서부라는 공간에 세워진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것은 한 개인이 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시로나마 가능한 해결조차, 그것이 폭력에 의한 것인 이상 마을 사람들의 적극적은 지지를 받을 수 없고 오히려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배척당하는 일도 흔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서부 사나이는 다시 마을을 떠나고 마는 것이다. 서부극의 범위가 워낙 넓어서 이런 단순한 이야기로 서부극의 ‘고전 서사’를 압축 설명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선 ‘서부극의 고전 서사’라는 말을 정말로 일반적인 서부극의 서사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구조를 일컫는 명칭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실제로 상당히 많은 서부극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럼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고원의 방랑자>가 고전서사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꿔 말하면 위에 언급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하거나 연출한)의 다른 서부극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고전서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들 역시 <달러 한줌>에 대한 글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고전적인 서부극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고전적인 서부극들에 대한 반성이나 패러디, 혹은 오마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을 순 있어도 그 바깥에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원의 방랑자>의 서사는 고전적인 서사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고전서사의 변형으로써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히려 그것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낱말이나 개념이 이 영화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것 같다.
그러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날 특히 당황시킨 부분은 바로 마을 세트의 모습이었다. 아주 단순화된 구조에 짓다만 건물들도 있는, 그야말로 ‘세트’라는 느낌을 풀풀 풍기고 있는 모습이다. 이 마을을 몇 킬로미터쯤 떨어진 원거리에서 잡는 쇼트도 여러번 나오는데 그냥 대로에 길 따라 건물 몇 채 서 있는 게 전부인 모습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레고마을 같다. 게다가 호텔엔 HOTEL이라고, 은행엔 BANK라고 가게 이름도 없이 그냥 크게 써 있는 모습은 컴퓨터 RPG 게임에서 볼 법한 것들이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고원의 무법자>에 등장하는 라고Lago라는 마을은 실제 서부에 존재하는 마을이 아니라(그리고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흉내도 내지 않고) 특수한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 특수한 목적이 무엇인가는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마을 공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만들어진 세트로만 존재하지만 묘하게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성격과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과거까지 가지고 있다. 왜 이렇게 불균형한 걸까?
여기에 굿판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면 꽤 편리한 설명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보통 굿이라는 건, 과거에 죽은 사람이 풀지 못한 한이 있을 때 그 한이 생겼던 상황을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한을 맺은 사람과 맺게 만든 사람을 다시 그 자리에 불러내 한을 풀게 하는 것이다. 이 비유를 계속 적용할 때, 한을 맺은 사람은 과거에 마을 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의(합의) 하에 악당들의 채찍에 맞아죽은 보안관 던컨이다. 그리고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이름 없는 자가 되어 돌아온다. 그가 돌아온 던컨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관객에게 알려진다. 우선 그가 처음 마을에 들어올 때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 그것은 단지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얼굴이다. 게다가 그가 마을에 도착한 첫날밤 던컨이 채찍에 맞아죽은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난장이 보안관이 그에게 이름을 묻는 장면. 주인공은 그가 이미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떠난다. 카메라는 다음 쇼트에 보안관이 손질을 하고 있던 짐 던컨의 이름이 적인 묘패를 보여준다.
그가 던컨의 유령임이 확실하다고 하면 그가 하는 행동들도 던컨의 복수로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자기가 죽는데 소극적으로 기여했던 마을사람들의 재산을 무단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소극적으로 괴롭히고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자들을 모두 여관으로 불러 모아 죽이며 마지막엔 채찍질 했던 악당들을 역시 채찍으로 처형한다. 특히 마지막 처형장면에서 그가 처음으로 실루엣을 드러낼 때 불타는 마을의 배경은 바로 지옥을 연상케 한다.
이 굿판에 불려오는 것은 산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던컨의 유령뿐만이 아니다. 한을 맺게 한 사람도 불려 와야 한다. 채찍질을 한 악당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라고로 달려오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실제로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과 조우하는 것은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지만 영화는 그 전부터 그들의 여정을 꾸준히 보여준다. 이것은 그들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긴 거리를 움직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 수감생활을 했으면 어디선가 몸 좀 풀고, 자기들이 할 일이 있다고 해도 좀 더 준비를 잘 해서 갈 법도 한데 감옥에서 라고까지 그 먼 길을 그저 직선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집요한 여정 끝에 도착한 마을은 어떤 모습인가? 안 그래도 만들어진 티가 풀풀 나던 라고의 세트지만 마지막에 모든 건물이 붉은 색으로 칠해진 모습은 그야말로 굿과 같은 (넓은 범위에서)일종의 종교적 행사가 일어날 곳으로 딱 들어맞아 보인다. 주인공은 그곳을 아예 지옥이라 이름 짓고 있다. 거기서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주인공한테 죽는 것뿐이다.
그래서 <고원의 방랑자>는 고전적인 서부극에서 희생자이기도 했던 서부 영웅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아주 노골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티가 팍팍 나는 공간에 유령임이 명백한 인물을 불러들여 그 한을 풀게 하고 있다. 만약 <고원의 방랑자>의 그것을 되돌아보는 방식이 더 은유적이었다면 고전 서부극의 틀 안에서 비슷한 작업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서부극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 그러한 영화들이 되돌아보기/반성을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서부극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원의 방랑자>는 그런 면에서 유일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단지 비슷한 예를 본 적이 없어서 뿐만이 아니라 이런 식의 작업 자체가 반복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고전서사라는 말이 서부극에 속하는 어떤 영화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이야기 구조를 뜻하는 말로 쓰였지만 지금부터는 더 광범위한 뜻으로 쓰겠다. 말 그대로 독자/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전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 있어서도 <고원의 방랑자>는 고전서사에 대한 반성이다. 아니, 차라리 픽션에 대응하는 낱말로 평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그렇다면, 신화의 예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재미와 감동을 전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같은 내용을 조금씩만 바꿔서 반복해도 좋지만 평론은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순간 <고원의 방랑자>가 유일한, 유일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인정하는 것이 된다. <고원의 방랑자>는 서부극에 대한 평론인 동시에 영화 일반에 대한 평론이기도 하다.
이런 작업을 하던 이스트우드가 결국 몇십년 뒤에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고전서사로 완전히 돌아간 듯한(돌아갔다고 해서 옛날 영화와 똑같은 영화를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그 틀 안에서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한다) 모습을 보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어쩌면 이런 귀향이야말로 서부극이 얼마나 강렬한 매혹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감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그는 단순히 노인답게 진지하면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다. 그가 배우와 감독으로서 행한 장르적인 작업들이 갖는 의미를 더 신중하게 평해야 할 것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단순히 과거의 일방적/폭력적이었던 서부극들에 대한 반성으로 읽는 것은 곤란하다는 뜻이다.
# by | 2008/08/02 01:41 | 2008년 여름 서부극 특집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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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라고를 보면서 이게 레고를 빗대어 표현한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런데 서부극은 제 나이땐 두세번씩 봐야 조금 이해가 가는것같아요
제가 지금 21인데.. 서부극을 몇년전에야 많이 보기 시작했는데, 촬영기법이나 흐름, 전개같은게 익숙치않아서인지 한번 봐서는 정말 뭔지 잘 모르겠더군요 두번 보면 아 이게 이걸표현하려고 하는거구나.. 하는
무튼 이렇게 평이 있으면 도움도 되고, 또 영화를 기대하면서 보게 되는 맛이 있어 좋은것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들려 글 읽고 가겠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