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객은 주인공의 꿈을 꾸는가? - <깝스 Kopps>


베니는 평화롭디 평화로운 마을의 할 일없는 경찰관이다. 범죄가 없는 이 곳에서 경찰한테는 화단에 들어간 젖소 끌어내기, 가게 문 고쳐주기, 마을 노인들의 사기 포커에 돈 잃어주는 일 밖에 할 것이 없다. 다른 경관들은 그런 소소한 일들에도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지만 할리우드 영화에 물든 베니는 다르다. 우린 한 번도 그가 영화 보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의 상상 속 행동들은 틀림없이 할리우드 형사물, 웨스턴, 그리고 <매트릭스>의 패러디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보아온 수많은 영화속의 경찰들처럼, 평화로운 마을의 위협하는 범죄자들을 멋있게 소탕하고 싶어 한다.
허나 베니의 바람과는 정 반대인 이 마을은 결국 범죄가 없다는 이유로 경찰서가 폐쇄될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경관들은 밥벌이를 위해, 혹은 뭐가 어찌됐든 경찰로 남고 싶다는 이유로 범죄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베니를 제외한 다른 경관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우스운 장면들은 크게 두 가지 동기에서 만들어진다. 하나는 경찰이 범죄를 조작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 그 자체이고 하나는 베니의 끝없는 환상이다. 일단 전자부터 살펴보자.

황당한 설정의 코미디 영화답지 않게 <깝스>의 연출은 참 조용조용한 편이다. 씬이 끊어지면 안 될 것 같은 시점에서 툭툭 넘어가버리는 편집은 자연스럽고 극적인 연결을 방해하며 배우들의 연기에도 과장이 없다. 배우의 연기에 과장이 없다는 말은 인물의 행동도 그렇게 평범하고 무난하고 상식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코미디가 되는 것은 정말 몇 가지 기본적인 설정들 때문이다. 즉, 노총각 야콥이나 너무 오래된 커플 아그네타와 라쎄 같은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경찰서의 존속을 위해 범죄가 필요한 상황.

그러나 가끔씩 삽입되는 베니의 환상 장면들은 이와 정 반대다. 앞서 말했듯 기본적으로는 할리우드 형사물을 많이 흉내 내고 있지만 베니의 상상은 원래 거짓말인 할리우드 영화들보다도 훨씬 심하게 과장돼 있다. 긴급 출동한 경찰차는 공중제비를 한 번 돈 다음에야 주차가 되고 베니는 권총을 하늘로 던져 바지춤으로 받아서 발사한다. 게다가 재생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가 매트릭스만큼 느렸다가 이랬다저랬다.

그런 환상 속에 살면서 베니는 행복하고 관객은 웃기고 동료 경관들도 나쁠 거 없으니 결국은 모두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환상이 현실과 섞이기 시작하는 지점부터는 문제가 있다. 우리 경관들의 범죄조작은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결국은 본청에서 나온 예시카에게, 있지도 않았던 총격전에 대해 설명해야 할 지경에 이른다. 적당한 거짓말로 둘러대지만 예시카가 탄흔의 방향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자 베니가 나선다. 그는 자기가 두 자루의 권총을 던져 각각 나무에 꽂고는 다시 다른 권총으로 꽂혀있는 총의 방아쇠를 맞춰 발사했다는, 그야말로 그 자신의 상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베니가 자기만의 환상을 경찰서의 존망이 걸린 현실로 끌고 들어오는 순간 그의 상식적인 동료들은 당황하고 화를 낸다. 동료들이 화를 낼 때는 그나마 나았다. 베니는 가짜 총격전으로도 모자라 이젠 가짜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하고 결국은 중앙에서 특수 기동대가 출동한다.

여기가 실로 흥미로운 장면인데, 베니의 상상을 벗어난 상태에서 최초로 할리우드 액션영화 같은 연출이 나오기 때문이다. 굳이 연출이야기를 안 해도 총을 들고 인질범과 대치하는 수십 명의 경찰들만으로도 얼마든지 ‘영화 같은 장면‘으로 보인다. 이 장면에서 베니의 상상이 현실화된 것으로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장난이 아니다. 손으로 총알을 잡아내는 과장도 없고 한 방울의 피도 튀기지 않은 채 적을 소탕하는 깔끔함도 없다. 오두막 안에서 실수로 발사된 총알 한 방에 전 기동대원은 무지막지하게 총을 갈겨대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엎드린다. 총격전은 현실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상황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웃긴 장면을 통해 가까스로 마무리되고, 경찰서는 폐쇄된다. 그래도 동고동락한 경관들은 서로 헤어지지 않고 함께 피자집을 차려 ‘람보’ 피자, ‘다이하드’ 피자, ‘스카페이스’ 피자 등을 팔며 다시 잘 산다. 그리고 베니는 여전히, 피자 배달차를 타고도 하늘을 날아다닌다.


난 베니의 사는 방식을 긍정한다. 그는 고양이한테 밥을 줄 때에도 초특급 기밀 첩보작전을 펼칠 수 있고 언제나 자신을 영웅으로 여길 수 있다. 벗겨진 가발 하나 때문에 무너지는 나약한 영웅이지만 그래도 그 동료는 입다물어주겠다고 맹세하지 않는가. 그래놓고 결국 경찰서에선 대머리를 드러내고 있지만 피자집을 열자마자 다시 일어서는 저 강인함!

그러나 베니의 삶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건 정말로 그가 강하고 훌륭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내 영화 보는 방식이 그의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최고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영화를 만든 이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상태로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가장 모범적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 극장의 시공간은 그 외부와 완전히 차단돼있다는 점이다. 옛날 긴 영화에는 중간에 쉬는 시간도 있었다지만 오늘날에는 한 번 상영관에 들어가면 짧게는 90분에서 길게는 세 시간 반 동안 꼼짝도 할 수 없다. 게다가 외부의 빛과 소리는 모두 차단된 상태에서 오로지 스크린에 비친 모습만 보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만 듣는다.

이 격리체험 자체가 영화를 보면서 얻는 가장 큰 것이다. 영화의 내용과 질은 부차적인 문제다. 아니, 부차적인 문제라기보다 격리체험의 질의 문제다. 좋은 영화란 딴 세상, 그것도 아주 아름답거나 숨 막히거나 아프거나 기쁜 세상을 보여주는 영화를 뜻한다. 물론 좋은 책도, 음악도, 연극도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필름은 가장 총체적이고 동시에 현실과 가장 떨어진 세계를 담는다.

필름에 담긴 이 모든 거짓말들과 그로 인해 꾸게 되는 꿈들에 대해 베니와 내가 공유하는 태도는, 그것은 항상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니는 자기네 경찰서의 존망에 영향을 끼칠 예시카한테도 말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난 그런 그를 보며 포스터를 두 번 붙이고 글 두 편을 쓰느라 얻은 피로를 씻는 것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고, 잊고, 자고, 꿈꾸고. 그리고 또 일어나면 된다.




*'씨네꼼의 시선' 자료집에 실을 글. 이 영화를 염맨의 소개와 함께 보고 싶으시면 20일 저녁 7시나 26일 오후 4시에 서울대학교 두레문예관(67동) 404호로.




그냥 나머지 시간표도 싣는다. 전작 모두 선정자에 의한 간략한 소개 있음. 기획보다 재미없는 상영회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아무튼 영화들은 재밌다고 생각. 새로 앰프를 구입해서 <반지의 제왕>에 거는 기대도 큼

by 염맨 | 2005/05/15 03:08 | 영화 잡설, 감상, 리뷰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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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석원군 at 2005/05/15 17:01
깝스, 마지막 늑대랑 비슷하다고 해서 말이 많았는데, 같이 본 사람들은 깝스가 낫다고 하더군요. ^^
Commented by darko at 2005/05/16 13:03
성년의 날 축하해요.
장미와 향수 그리고 키스를 받으시길...
Commented by 은하 at 2005/05/16 19:42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_+ 그나저나 미리내로부터 우쿨렐레를 전달받아 전달해야 할 사명을 띠었는데 염맨님은 학교에 언제 계시나요??

전 월화수목 9시,1시,2시반...수업이고 금요일은 4시 수업입니다...ㅡㅡ;;;
Commented by 염맨 at 2005/05/17 03:43
darko/ 이런, 한 개도 못 받았어요. 다행히 처음부터 별로 바라지도 않았지만.
Commented by 은하 at 2005/05/18 05:33
으으음...죄송..조금 전에 봤네요^^;;(늦게 잔게 아니라 일찍 일어난거에요오;;;)...오늘은 일이 있을거 같아서 다음기회가 될 듯 싶은데요..ㅡㅡ;;;
Commented by 랑새 at 2005/05/19 23:52
염군 혹시 도곡동 삽니까?
나 아침에 그대인 듯 한 사람 스치었소. 출근 시간이 빠듯하여 급히 걸음을
옮기는라 잘 보지는 못했지만 처음 봤을때 문득 어디서 본 얼굴-
에서 에? 본 얼굴? 하고 다시 뒤돌아 보았더니 그쪽도 날 돌아보더라는 =_=;;
혹시 아침 9시경 도곡역에 있지 않았는가 하여 물어보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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