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서 레포트 몇 편 쓰면서 하나마나한 말을 쓰는 것을 무척 싫어하게 되었다. 남들이 이미 다 자세하게 연구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역사적, 현실적 배경을 밝히고 결론까지 내려둔 일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살다가, 친구랑 얘기하다가 머리속에 문득 떠오른 것만으로 같은 일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게 글을 쓰자면 이미 나온 연구에 대해 조사를 해야 되는데 그건 너무 귀찮다. 그런 식으로 글 쓰는 건 이미 수업을 위해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블로그에 글을 잘 안 쓰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거 별로 부끄럽게 생각 안 하는 모양이다. 하긴 글을 쓰는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 난 아무래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다보니, <드래곤 길들이기> 완전 귀엽고 신난다 하는 식의 이야기는 도통 쓸모가 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유령 작가>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거장이며, 성추행 사건으로 구금돼있다는 얘기, 뉴스에 수없이 나온 말 들인데 대체 그런 말 블로그에서 또 해서 뭐 하나.
각자의 사연으로 글 쓰는 이들을 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당연히 그럴 자격도 없고. 그냥 나는 그런 거 잘 못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즘도 머리속에 굴러다니는 몇 가지 큰 주제가 있는데 글로 써낼 엄두가 안 난다. 이야기들이 워낙 굵직굵직해서 최소한 논문 한 편이나 단행본 한 권 분량으로는 써야, 하나마나 한 얘기가 아니게 될 수 있다.
"감성과 감수성의 차이". 미학 논문 수십개는 읽어봐야 비슷한 얘기가 언제쯤 나왔는지, 얼마나 비슷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 논문 한편한편이 엄청나게 난해할 가능성, 영역본도 찾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우리말로 된 각종 2차저작물들은 있겠지만, 그리고 학부 레포트 제출용으로는 그냥 그런 것만 참조해서도 글을 썼었지만 자진해서 글을 쓰는 마당에 그런 식은 부끄럽다.
"참정권의 포기 불가능성". 이건 국문으로 된 글만 검색해서 참고해도 무난할 거 같다. 우리나라도 정치학, 사회학, 법학 등에는 충분한 역사가 있으니까. 덩치도 비교적 작다. 현실적으로, 완성된 글로 써낼 가능성이 셋 중 가장 높다. 그래도 역시, 귀찮아서 안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제 방학이 와서 한동안 글 쓰는 의무가 부과되지 않을 테니 이번 기회에 쓸 수도 있지만, 하필이면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라 타이밍이 안 좋다. 선거 직전이 좋았는데.
마지막 주제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승자독식체제"이다. 이건 학술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시사 평론이나 칼럼 같은 데서 단골로 나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수많은 인과관계를 엄밀하게 설정하면서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는 이야기를 하려면 역시 학술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헌데 '한국사회를 지배하는'이라고 제목을 달아놓은 것이 문제다. 교육, 경제, 정치 등 사회의 모든 면을 다뤄야 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도 동네 구멍가게와 SSM, 중소기업과 대기업, 법조계, 의료계, 대학계 등 하나하나 따져봐야 할 것이 더럽게 많다. 헌데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승자독식체제'라는 패러다임의 유효성을 충분히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대충이라도 말을 해볼까?
# by 염맨 | 2010/06/07 19:00 | 알 수 없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